나는 선암사를 갔었다.
2009년의 다이어리가 내게 사실을 알려주었다.
나는 선암사를 갔었다.
2014년 8월 13일
신라에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을 지나 지금에 이르는 아기자기한 오래됨이 있는 선암사.
입구의 새 건물은 첫인상을 흐릴 수 있지만
자갈길을 따라 골목골목 나타나는 오래된 서까래와 낮은 담장, 기와의 이끼는 세월에 얼굴을 가져가게 하는 힘을 지녔다.
그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었고
그 연못도 그때 지났다.
그 목어와 그 북을 봤고
그 탑들도 거기 있었으며
그 집이 매우 인상적이었다.
그 하늘은 올해보다 눈부셨고
그 해에는 초록이 조금 더 늘어졌었다.
그 담장과 기와와 초록이 기록되어 있다.
나는 선암사를 갔었다.
하지만 나는 선암사를 갔었을 뿐이었다.
나에게 선암사는 기억되어 있지 않았다.
아마
그래서
분명
선암사가 나를 불렀을 것이다.
그렇지 않고서야
2015년의 같은 날 의도치 않게 그 곳을 방문할 수는 없다.
그렇지 않고서야 2009년의 기록이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.
그 북과 그 목어는 지금도 쓰이는 것이었다.
선암사에 발을 딛자 북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.
나는 혼비백산 했다.
그 오래된 북이 울린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며
그 목어는 배를 가르며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 지 못했다.
오래된 것이 제 몸을 울리며 내는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듣는 것이다.
심장이 그 소리를 따라 울려 나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.
작년엔 못 보던 것이 있었다.
그것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
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내가 못 보던 것이다.
못 봤던 것들이 여기저기 무심코 널려있었다.
이 곳을 다 보기 위해서 앞으로 몇 번 더 이곳을 방문해야 할까
작년과 올해 같은 여름 심지어 같은 날 와도 이렇게 다른데
이곳의 봄은 어떠할 것이며 가을은 어떠할 것이며 겨울은 어떠할 것인가.
이곳의 초봄은 어떠할 것이며 늦가을은 어떠할 것이며 겨울의 막바지는 어떠할 것인가
이곳에서 첫 새싹이 돋아날 때는 어떠할 것이며 밤 새 눈이 내려 소리가 사라진 아침의 이곳은 어떠할 것인가
나는 아무리 해도 이곳을 다 알 수가 없을 것인데
그것이 분하면서도 기쁘다.
그리고 나의 미숙함이 부끄러우면서도 끝없을 경외의 대상을 찾았음에 설레인다.
들어가 보지 못한 곳에 들어갔다.
그 곳엔 내 평생 단 한번뿐일 장면이 있었다.
선암사는 살아있다.
저 나무의 결과
저 돌의 짜임새와
저 빛의 각도
마지막 순간까지
나의 눈과 귀와 심장을 모두 동원해서
말을 아끼고 발소리를 줄이고 서서 혹은 걸으며
올해는 충실히 보았다.
가시지 않는 여운으로 가득 찬 채 어둑어둑해진 길을 되짚어 나왔다.
아...
나는 꼭 봐야지 했던 물확을 볼 생각도 못하고 나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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